- ▲ 덕신산 줄기의 바위지대에 올라 진도 일대를 조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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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어찌나 센지 자동차가 술에 취한 듯 휘청거렸다. 서해대교가 풍압을 견디며 몸을 떨었다. 태풍에 버금가는 초속 30m의 바람이 한반도를 강타한 날이었다.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로 세찬 바람이 우리를 따라 다녔다. 제법 기온이 올랐지만 여전히 체감 계절은 겨울. 진저리나는 추위를 피해 진도로 향했다.
전라남도 서남단의 바다에 위치한 진도는 봄철 여행지로 인기 있는 섬이다. 천연기념물 진돗개를 비롯해 특산물인 홍주와 구기자로 유명하며,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신비의 바닷길, 운림산방, 진도아리랑, 다도해의 비경 등 많은 볼거리도 갖췄다. 언제나 휴일이면 많은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이달에는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첨찰산(尖察山·485m)과 그 남쪽의 덕신산(德神山·395m)을 잇는 능선길을 답사했다. 이미 첨찰산은 진도의 대표적인 산행지로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하지만 바로 옆의 덕신산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고 산세도 수수해 크게 눈길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그만큼 때가 덜 묻어 자연의 순수한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다.
첨찰산과 덕신산은 하나의 산줄기에 솟았지만 중간에 찻길이 지나며 산길이 끊어져 있다. 하지만 고갯마루인 두목재는 차량의 통행이 적어 두 산을 연결해 산행하는 데 큰 무리가 없다. 그리고 이렇게 산 두 개를 이어서 타야 한나절 산행에 적당한 거리가 나온다.
- ▲ 첨철산 덕신산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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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워 좋은 덕신산 능선
첨찰산 산행 기점인 운림산방 앞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정면에 보이는 운림산방 뒤편으로 첨찰산 줄기가 병풍처럼 솟아 있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널찍한 공터는 아늑하고 조용했다. 바람도 잠잠해 산행을 즐기기 좋은 날이었다.
주차장에서 출발해 남쪽 산자락을 타고 덕신산 능선을 먼저 올랐다. 아무래도 고도가 낮고 산길이 부드러워 오르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운림휴게소 옆의 흙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등산로 입구가 모습을 드러낸다. 산길은 곧바로 하늘을 가리는 짙은 숲 속으로 숨어든다. 제법 가파른 산자락에서 숨을 헐떡였다. 잠시 뒤 따스한 햇볕이 내려쬐는 무덤 옆의 공터로 올라섰다. 잔디밭에 앉아 재킷을 벗고 잠시 숨을 돌렸다.
오늘 산행에는 현지 가이드가 특별 출연을 자청하고 나섰다. 운림휴게소 뒷마당을 거닐던 하얀 진돗개 한 마리가 우리를 따라온 것이다. 처음에는 잠깐 동행할 것처럼 이리저리 일행들 주변을 뛰어다녔는데, 능선에 올라선 뒤부터 줄곧 앞에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예상치 않았던 든든한 길동무가 생겼다.
4월의 덕신산은 봄기운이 완연했다. 길옆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트리며 깨어났고, 풀잎이 파랗게 바닥에 깔렸다. 두텁게 쌓인 낙엽을 뚫고 꽃을 피운 야생화도 작은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소사나무 군락은 여전히 갈색의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마른 가지에 신록이 돋으려면 아직 한 달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 ▲ 1 덕신산 능선에는 드러난 바위지대가 많아 전망이 좋다. 2 덕신산 산행기점인 운림휴게소 옆의 골목길. 3 첨찰산 정상에 쌓은 봉수대. 경치가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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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짙어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덕신산은 조망이 좋았다. 산줄기가 굽이치는 곳마다 드러난 전망바위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진도 동남쪽 해안의 아기자기한 풍광이 아름다웠다. 진도에 딸린 접도와 금호도 일대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해남 송평해수욕장 앞의 상마도와 하마도 등도 아스라하게 펼쳐졌다. 바다를 보는 재미가 남다른 코스였다.
징검다리처럼 나타나는 바위 봉우리들을 밟으며 전진했다. 산길 입구의 등산로 안내도에 나온 학정봉과 화개봉, 정삼이절터 등은 확인할 수 없었다. 정상석이나 이정표 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개발의 손때가 거의 묻지 않은 곳이었다.
동네 진돗개 한 마리와 동행
능선 위에 나타나는 초지에 앉아 한동안 봄볕을 즐겼다. 발 아래로 초사리 일대의 길고 좁은 농토가 한눈에 드는 곳이었다. 그 뒤로 펼쳐진 바다는 옅은 안개가 가득해 시야가 좋지 않았다. 편안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했다. 이제 일행이 된 ‘진돌이’도 우리 옆에 드러누워 보조를 맞췄다. 간식으로 가지고 온 빵과 물을 함께 나눠 먹으며 산행을 위한 팀워크를 다졌다.
잠시 뒤 능선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며 지형도에 표기된 덕신산 정상부에 섰다. 동쪽으로 향동리 일대의 널찍한 들판이 한눈에 드는 곳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농로와 알록달록한 농가의 지붕색이 극명하게 대비됐다. 한결 가까워진 바다 위의 섬들도 정겹게 다가왔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멋진 풍광에 가슴이 시원해졌다.
- ▲ 첨찰산 오름길. 뒤로 진도기상대의 둥근 시설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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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능선이 북서쪽으로 꺾이며 첨찰산을 향해 이어졌다. 산길은 덕신산에서 북쪽으로 500m 거리의 안부에서 서쪽 사면을 우회하며 두목재로 이어졌다. 운림산방에서 아리랑비를 거쳐 향동리로 넘어가는 포장도로가 이 고갯마루를 지난다. 또한 첨찰산 남쪽 480m봉의 진도기상대로 이어지는 좁은 찻길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두목재에서 도로를 건너 진도기상대 쪽으로 조금 걸어가다 왼쪽 숲으로 방향을 틀었다. 산길은 능선을 타고 가파르게 산정을 향해 솟구쳤다. 이런 된비알은 진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를 오르려면 누구나 치러야 할 신고의례였다.
곳곳에 바위가 드러난 가파른 길을 40분쯤 올라서니 진도기상대 외곽의 철조망이 나타났다. 위를 보니 축구공처럼 둥그런 시설을 갖춘 기상대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조망을 따라 우회한 뒤 기상대로 들어갔다.
명불허전! 상록수림의 감동
진도기상대에는 탐방객을 위한 홍보시설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3층의 전망대에서 보는 진도 일대의 조망이 탁월하다. 첨찰산 정상과 거의 비슷한 높이인 데다, 시야를 가리는 구조물이나 숲이 없기 때문이다. 기상대 직원에 따르면 “날이 좋으면 바다 건너 한라산이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잘 보인다”고 한다. 기상대에서 잠시 바람을 피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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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림산방~덕신산~두목재~첨찰산~쌍계사 원점회귀 산행
- ▲ 상록수림을 관통하는 계곡 분위기가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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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대에서 도로를 타고 헬기장이 있는 안부로 내려선 뒤 곧장 첨찰산 정상으로 향했다. 안부에서 봉수대가 있는 정상까지의 거리는 200m 남짓. 그리 힘들이지 않고 진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섰다. 돌을 쌓아 만든 봉수대에 올라서니 사방으로 조망이 터졌다. 고생스럽게 산에 오른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하산 코스는 ‘천연기념물 107호’ 진도 쌍계사 상록수림이 있는 삼선암골로 잡았다. 하지만 계곡으로 내려서는 가장 짧은 코스인 넓적바위 방면의 능선이 휴식년제로 막혀 있었다. 주능선을 타고 돌아갈 수도 있지만 거리가 짧은 쌍계사 뒤쪽 능선을 타고 곧바로 내려서기로 했다.
바위지대를 지나 능선을 타고 조금 진행하다 오른쪽 계곡으로 방향을 틀었다. 능선을 벗어나니 이곳 특유의 짙은 상록수림이 시작됐다. 이 곳에는 동백나무와 후박나무, 참가시나무, 감탕나무 등 상록교목과 졸참나무, 느릅나무와 같은 낙엽활엽교목이 섞여 숲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지역특산식물인 삼색싸리와 돌팥이라 불리는 돌동부 등도 자라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록수림으로 자연 상태가 잘 유지되고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삼선암골의 짙고 시원한 숲을 만끽하며 느긋하게 걸었다. 엊그제 비가 내린 덕분에 계곡에는 풍부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상쾌한 느낌을 주는 숲은 흔치 않다. 쌍계사까지 이어지는 산길을 아주 천천히 즐기듯 내려섰다. 계곡을 벗어나는 것이 너무 아쉬웠기 때문이다. 첨찰산 상록수림은 역시 이름값을 하는 곳이었다. 봄날 산행지로 강추할 만한 대상지다.
- ▲ 1 쌍계사로 이어지는 좁은 산길. 2 진도대교와 울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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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길잡이
완만한 능선으로 올라 상록수 터널로 하산
보통 첨찰산을 오를 때는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400m가량 올라가면 나오는 진도아리랑 기념비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덕신산을 먼저 오를 때는 주차장 남쪽의 운림휴게소 옆의 골목을 지나 산으로 들어간다.
첨찰산과 덕신산을 연결한 산행은 운림산방 앞 주차장 기점의 원점회귀 코스가 적합하다. 주차장에서 무덤을 지나 주능선에 오른 뒤 계속 숲이 우거진 산길을 따른다. 하지만 중간에 나타나는 바위지대에서 시원한 조망을 감상할 수 있다. 뚜렷한 주능선을 따라 첨찰산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주차장에서 출발해 덕신산 주능선을 밟고 두목재까지 가는 데 약 4.5km 거리로 2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두목재는 진도아리랑 기념비에서 동쪽으로 오르는 찻길이 고군면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다. 여기서 북쪽으로 뻗은 능선을 타고 첨찰산으로 오른다. 가파른 사면을 통과한 뒤 처음 만나는 봉우리에는 진도기상대가 있다. 이곳에서 잠시 숨을 돌린 뒤 안부를 지나 첨찰산 정상에 선다. 두목재에서 첨찰산까지는 약 2km 거리로 1시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하산길은 서쪽 쌍계사로 내려서는 계곡길이 인기다. 넓적바위 코스는 폐쇄되어 능선을 따라 25분 정도면 쌍계사 뒤편의 삼선암 계곡으로 내려선다. 이 길을 따라 20분 거리에 이르면 오른쪽 계류 옆 바위지대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석간수 샘터를 만난다. 여기서 30분가량 상록수림 터널을 빠져나오면 쌍계사에 닿는다.
교통 일단 서해안고속도로의 남쪽 끝 목포까지 달린다. 목포나들목을 나와 영산호 하구둑을 건너자마자 우회전, 대불공단을 가로질러가서는 좌회전해 영암방조제, 이어 금호방조제 건너 77번국도로 곧장 20km쯤 남하하면 진도대교에 다다른다. 진도대교를 건너 읍내까지는 20분 남짓이면 된다. 진도읍에서 801번 지방도를 타고 쌍계사까지 갈 수 있다.
서울에서 진도까지 하루 4회 운행되는 고속버스가 있다. 5시간 40분 소요된다. 광주~진도 간 버스 1일 31회 운행, 2시간 30분 소요. 목포~우수영~진도 간 1일 20회 운행, 1시간 소요. 진도공용터미널(061-544-2141)에서 하루 5회 운림산방까지 운행하는 군내버스가 있다.
숙박 첨찰산과 덕신산으로 둘러싸인 운림산방 근처의 운림예술촌은 독특한 문화체험과 숙박이 동시에 가능한 곳이다. 10명 이상 단체로 예약을 받으며 부녀회에서 준비하는 석식과 조식이 제공된다. 숙박과 별도로 서화, 떡메치기, 짚공예 등 민속체험도 가능하다. 1박 1인 기준 4만 원.
문의 061-543-5889. 주소 전남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501.
진도의 별미 간재미 간재미는 가오리와 비슷한 바닷고기로 살은 부드럽고 담백해 진도 사람들이 즐기는 별미다. 살이 통통하게 오르는 겨울부터 이른 봄 사이 가장 맛이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간재미를 된장에 찍어서 회로 먹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회무침, 탕, 찜 등으로 내놓는다. 홍어처럼 톡 쏘는 맛이나 비린내가 없어 회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쉽게 즐길 수 있다. 여기에 진도 전통 명주인 홍주를 곁들이면 상은 더없이 푸짐해진다.
진도파출소 맞은편의 문화횟집(061-544-2649), 성내리의 제진관(061-544-2419) 등이 유명하다. 간재미찜이나 회무침(2~3인분 기준) 2만~3만 원, 탕은 2만 원 선이다.
- ▲ 1 정원이 아름다운 운림산방 2 천년고찰 첨찰산 쌍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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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산방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癡) 허유(許維·1809- 1893) 선생이 말년에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로서 일명 ‘운림각’이라고도 한다. 추사 김정희에게 그림을 배운 인물로, 늦깎이지만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다. 그는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첨찰산 쌍계사 남쪽에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이후 이곳은 소치(小痴)~미산(米山)~ 남농(南農)~임전(林田) 4대에 걸쳐 이어온 한국 남화의 본거지가 되었다. 운림산방은 연못과 어우러진 정원의 조화가 아름답다. 또한 이곳에 소치의 사당과 소치·미산·남농의 3대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소치기념관, 진도의 고유한 문화적 배경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진도역사관 등이 조성되어 있다. 관람료는 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 초등학생 800원. 문의 061-543-0088.
첨찰산 쌍계사 신라 때인 857년(문성왕 19)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이 절은 절 양편으로 계곡이 흘러 쌍계사라 불렀다고 전한다. 대웅전은 1982년 수리 때 ‘숙종 23년’이라 쓰인 기록이 발견돼 1697년에 세워졌음이 확인됐다. 목조삼존불좌상은 가운데 본존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시불을 모시고 있는 형태인데, 대웅전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쌍계사 사찰 뒤쪽 계곡의 천연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된 상록수림이 일품이다.
- 운림산방~덕신산~두목재~첨찰산~쌍계사 원점회귀 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