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우/논설위원
2000년대 중반 국제 시장에서 구리 가격이 폭등하자 주 생산국인 칠레가 돈방석에 앉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노동계가 그 돈을 복지 확대에 쓰자고 요구했다. 당시의 재무장관 안드레스 벨라스코는 “돈을 아꼈다가 어려울 때 써야 한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여당 내에서조차 장관이 세상 물정 모른다며 인신 공격을 퍼부었다. 온갖 비난과 압력에도 장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2008년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덮쳤다. 벨라스코 장관은 비로소 잘나갈 때 비축해 두었던 재정을 풀어 대대적인 경기부양에 나섰다. 칠레가 여유있게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지난 4월 다시금 미국 소의 광우병 발병이 보도되고서였다. 검역 및 수입 중단을 요구하는 여론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하지만 서규용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검역 강화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발병 형태나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 한·미 무역 마찰 등을 종합한 자체 판단이었다. 당장 국회에서 난리였다. 광우병 시민단체나 언론까지 비난 일색이었다. 장관은 일절 굴하지 않았다. “전혀 문제가 없다는데 왜 그 짓(검역 중단)을 하느냐”고 당당하게 설명했다. 얼마 후 광우병 촛불은 제풀에 사라졌다.
올 1월 소값 폭락 때도 마찬가지였다. 축산 농민들이 소를 끌고 서울로 와 수매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려하자 서 장관은 부당한 요구라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되레 “소떼 이동으로 구제역이 발생하면 농가에 구상권을 청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소들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식품 원료에서 벤조피렌이 검출됐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오락가락하면서 국민 피해를 키우고 있다. 일부 라면 속에 포함된 벤조피렌은 삼겹살 구워먹을 때 나오는 양의 1만6000분의 1에 불과하다더니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문제를 삼자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다. 그러면서 “부적합 원료를 쓴 라면을 회수하겠다”고까지 했다. 이로 인해 해당 라면의 수입국들조차 리콜하겠다고 나서는 등 부작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과학적 검토를 거쳤음에도 국민 정서나 높은 분들의 호통 한마디에 조변석개하는 관료라면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식약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처럼 전문기관이다. 여론에 앞서 과학적 평가에 충실해야 할 뿐이다.